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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이 왔어요.하동에 지난 18일 밤사이 첫눈이 내렸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첫눈은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첫눈은 어린 시절 향수와 추억으로 다가옵니다. 첫눈은 설렘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첫눈을 서설(瑞雪)로 여겨 올 한해를 잘 마무리하고, 내년에도 풍요를 부르는 좋은 징조로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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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숭아 꽃물첫눈이 올 때까지 손톱에 들인 봉숭아 꽃물이 지워지지 않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며 깔깔거리던 단발머리 시절이 생각나는 계절이다. 그녀의 화단가 여기저기에 봉숭아꽃이 피었다. 빨간 꽃송이, 하얀 꽃송이가 탐스럽다. 잎과 꽃을 한 움큼 따와서 작은 도기에 콩콩 찧는다. 휴양림을 즐겨 찾았던 우리가 치유농장을 만들기 시작한 친구 덕분에 그 농장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내 화단에서 옮겨간 꽃들이 얼마나 자랐는지, 모종으로 있던 농작물이 얼마나 풍성해졌는지 언제나 궁금하다. 손톱에 올린 봉숭아꽃이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걷는다. 백반을 넣고 비닐과 실로 동여매지 못하고 대충하는 탓이다. 손바닥만 한 내 집 마당과 달리 농원을 꾸밀 준비를 하는 그녀는 요즘 무척 분주하다. 상담을 하는 그녀는 상담과 농업을 접목한 치유농업을 공부하면서 차근차근 준비를 하는 중이다. 치유농업이란 농촌 자원이나 그것을 가꾸는 활동을 이용하여 사람들의 신체, 정서, 심리, 인지, 사회 전반적인 곳을 건강하게 하려는 활동과 산업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건강과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웰빙’ 열풍이 2010년 이후 인간과 자연 모두의 치유를 통해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위한 ‘힐링 트렌드’로 변화하였다고 보면 될 것 같다. 힐링의 측면에서 농업은 신체활동으로 인한 물리적 효과 외에도 생명을 돌보는 주체가 된다는 자존감도, 내가 가꾼 것이라는 소유의식, 또 생명을 존중하는 사상 등으로 심리적인 효과가 큰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내가 북천으로 옮겨와 행복한 이유는 아침저녁으로 흙을 만지는 일이었구나 깨닫는 요즘이다. 치유농업과 일반 농사와의 가장 큰 차이는 치유농업은 농사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건강의 회복을 위한 수단’으로 농업을 활용한다는 것이다. 경쟁에 지친 도시민들이 농업·농촌에서 치유적 도움을 얻고자 하는 수요가 증가하는 추세에 있다. 아직도 시골에서 땅을 밟고 살 수 있는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이다. 더구나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흙이 있다면 더 많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면서 살 일이다. 흙은 모든 생명의 시작이며 그 생명을 키워내는 일을 하는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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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회룡의 정겨운 하동말 이바구(99)김회룡의 정겨운 하동말 이바구(99) □ 개겁다(가갭다,개굽다,해겁다,해꿉다) : 가볍다@ 무굽은지 개겁은지는 들어 바아야 안깨내 쎄기(빨리) 함 들어 봐아라.@ 니는 사램이 오찌 찐득허지 몬허고 궁디이가 그리 개굽내?@ 오올따라 기부이 좋코 몸도 여엉 해겁다. @ 니라도 내 여불때기(옆)에 있이 준깨내 맴이 쪼꼼 해꿉따.□ 배미(구랭이, 구리이, 구링이) : 뱀친구1 : 아이고, 어지 그거 쪼깸 날린기 그기 첫눈이라카내.친구2 : 하모, 날리도 첫눈은 첫누이지. 우리 하동매이로 따신 지방서 펑펑 내리는 첫눈을 기대허모 되는가, 이사람아. 원래 첫눈은 첫누이래서 연습 삼아서 쪼깸 온다 안쿠던가배. 마져 몬 걷운 가실농사 후딱 마치삐라꼬 연습 삼아 쪼깸 온다는기라. 좀있이모 함박눈 펑펑 내라 주낀깨 미리 알아고 쪼깸 온다는기라. 거어 머이고 벌거지, 씨갓, 배미랑 싹다 저실잠(겨울잠) 자라꼬 쪼깸 온다는기라. 그리고 또 추부지기전애 따신 저실옷도 준비허고 짐장도 준비허라꼬 그 소식 딱 미리 에~(알려) 주끼라꼬 원래 서너송이 내리는 기 첫눈인기라. □ 뭐드러 : 뭐하러아들 : 아부지, 아부지는 어매헌태 꽃 한번 꺽어 조봤능가예?아부지 : 아이가, 누 어매가 꽃인디 뭐드러 꽃을 꺽어. 안그렁가 할마시야. 흐흐□ 오새 : 요새@ 요 근래에는 절머이들이 인사헐 때 오래 사이소 허지만도 오새는 오래 살라고 허모 인사가 아이다. “건강허이소 오째든간애 건가이 오래 사시이소” 그러캐 해야 올체(옳다) 방에 누부서 똥싸고 오좀 싸는데 오래 살모 뭐허껏고. “건강허게 사시이소” 오새 인사말은 그리키 해야 옳타코 그리 시푸다.□ 핫바지 방구새디시 : (아무도 모르게)살며시갑 : 내 올때꺼정 지다리라 캤더마 싹다 어디 가삣내?을 : 하도 지다리다 안온깨내 핫바지 방구새디시 싹다 시이실 새빘어예.□ 호불할매 : 남편없이 혼자사는 할머니갑 : 할매, 할배는예?을 : 나 호불할매다. 영감하나 있이모 중신좀 해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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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동편제 명창 유성준과 이선유 이야기<98>하아무 작가선유는 단전에 힘을 주고 지리산의 장엄한 정기를 그곳에 모았다. 그 힘으로 <수궁가> 중 <토끼 배 가르는 대목>을 불러 젖혔다. 방탕한 용왕의 희생양이 되지 않게 꾀를 내고 발버둥을 친 토끼처럼 온힘을 모았다.“그러면 토끼 바삐 잡아드려라, 명이 나니 좌우나졸 금군 모조리 순령수 일시에 내달아 토끼를 에워쌀 때, 진황 만리장성 싸듯 산양(山陽)싸움에 마초(馬超)쌓듯 첩첩이 둘러싸 토끼 들이쳐 잡은 거동, 영문출사(營門出師) 도적 잡듯 토끼 두 귀를 꽉 잡고, 네가 이놈 토끼냐. 토끼 기가 막혀 벌렁벌렁 떨며….”소리를 할수록 어떤 기운이 가슴을 요동치게 했다. 그 기운은 온몸 구석구석을 휘돌며 천천히 배어들었다. 늦가을 차가운 바람이 뼛속까지 시리게 했지만 선유의 몸에서는 오히려 뜨거운 기운이 솟구쳤다.노을이 번지고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지만 선유의 신명은 높아만 갔다. 드디어 토끼가 꾀를 내는 순간이었다.“소퇴의 간인즉 월륜정기(月輪精氣)로 생겼삽더니 보름이면 간을 내고 그믐이면 간을 들이네다. 그때는 세상의 병객들이 소퇴 곧 얼른 하면 간을 달라고 보채기로 간을 내어 파초 잎에다 꼭꼭 싸서 칡노로 칭칭 동여 의주 석산 계수나무 늘어진 상상가지 끝끝어리 잡아메고 도화유수옥계변(徒花流水玉溪邊)의 탁족(濯足)하러 내려왔다 우연히 주부를 만나 수궁흥미가 좋다기로 완경차로 왔나이다….”한번 시작한 소리를 멈출 수 없었다. 사위가 어두워졌지만 선유는 소리를 계속했다. 배가 고프지도 않고 딴 생각이 끼어들 틈도 없었다.“별주부 정성으로 대왕병도 즉차허고 토끼는 그 산중에서 완연히 늙더라. 그 뒤야 뉘가 알리. 호가창창 불악이라, 더질더질.”드디어 <수궁가> 한바탕이 끝났다. 천지가 온통 선유의 소리로 채워졌다가 일시에 썰물처럼 빠져나간 것 같았다.그제야 멀리서 늑대인지 산짐승의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서서히 벌레소리도 살아났다. 열기가 빠져나가고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때마침 조금씩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였다. 첫눈이었다.선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어두워지고도 한참이 지났으니 아무것도 보일 리 없었다. 이미 산을 내려가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어릴 때 듣던 도깨비와 구미호 이야기가 문득 떠올랐다. 어른들은 한밤중이면 으레 도깨비와 밤새 씨름했던 이야기와 백여우에 홀리거나 저수지 물귀신에게 끌려 들어간 이야기를 했다. 그럴 때면 스산한 바람이 대숲을 흔들며 지나가거나 날짐승 길짐승들의 소름 돋는 울음이 낭자했다. 그 귀신 중에 어덕서니가 있었다. 한밤에 길을 가다보면 만나게 되는데 얼핏 보면 어린아이처럼 생겼지만 흉칙해 눈길을 주게 되면 크기가 자꾸 커진다는 거였다. 올려다보면 올려다볼수록 더욱더 커져서 마지막에는 사람이 깔려버리게 된다고 했다. 반대로 그렇게 커지고 있는 것을 억지로 내려다보면 점점 작아지고 아예 눈길조차 주지 않고 거두면 마지막에는 다시 사라져버린다는 귀신이었다. 그런 귀신을 상상하고 있자니 공연히 머리가 서고 뒷덜미가 서늘해졌다.“영웅열사(英雄烈士)와 절대가인(絶對佳人)이 삼겨날 제 강산정기(江山精氣)를 타고 나는디 군산만학부형문(群山萬壑赴荊門)에 왕소군(王昭君)이 삼겨나고 금강활이아미수(錦江滑 峨嵋秀)에 설도문군탄생(薛濤文君誕生)이라. 우리나라 호남좌도(湖南左道) 남원부(南原府)는 동으로 지리산 서으로 적성강(赤城江) 산수정기(山水精氣) 어리어서 춘향이가 삼겼겄다….”선유는 그 자리에 앉은 채로 다시 소리를 시작하였다. 이번에는 <춘향가>였다. 소리를 하며 선유가 어덕서니를 억지로 내려다보기 시작하자 무서움증도 어느새 사라져버렸다.그렇게 <춘향가>를 부르고 밤새도록 <흥보가>와 <심청가>를 불렀다. 전 같으면 <수궁가>만 한바탕해도 목에 무리가 가고 힘이 들었을 터였다. 하지만 소리를 할수록 목에 힘이 붙고 흥이 나면서 감칠맛이 더해지는 것 같았다. 내리는 눈이 머리며 어깨를 덮어 따뜻하게 감쌌다. “한(漢)나라 말엽 위한오(魏漢吳) 삼국시절에 황후유약(皇后幼弱)허고 군도병기(群盜竝起)헌디 간흉(奸凶)허다. 조맹덕(曺孟德)은 천자를 가칭(假稱)하야 천하를 엿보았고….”달구리 즈음엔 <적벽가>를 시작하였다. 천하를 굽어보며 호령하듯 <적벽가>를 불러 젖히는 맛은 남다른 것이었다. 박기홍 명창이 <적벽가>로 흥선대원군의 혼을 빼놓던 기세로 내달렸다. 제 손으로 말 달리고 활을 쏘며 칼을 휘두르듯 소리를 내뱉었다. 적벽강 불지르는 대목에서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땀이 흐르고 열기 때문에 온몸에서 김이 났다. 누군가 그런 선유의 모습을 보았다면 “이인(異人)이 나타났다!”고 소리를 질렀을 터였다.마침내 <적벽가>를 마쳤을 때 동녘 하늘에서 붉은 햇살이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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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의 맛과 멋 그리고 이사람(55)나즈막한 뒷산을 따라 동향으로 길게 펼쳐진 마을에는 조순철(男, 40세)이장을 비롯해 48호에 100여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하동군 고전면【명교마을】은 진교면과 양보면을 잇는 가교(架橋) 역할을 담당하는 지리적 요충지(要衝地)이기도 하다.여유있게 흐르는 마을 앞 주교천 제방에서면 한눈에도 넉넉하게 들어오는 작은 자연마을이다.명교마을은 365일 어떤 변화에도 전혀 구애(拘?)받지 않았으며, 깨끗하고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하는 그래서『참 살기좋은 마을』이다.그러니, 지금 아무 때나 시간에서 허락을 받을 수 있다면 이 고전면 명교마을로 가보라.어디서 이런 천혜(天惠)의 작품을 쉽사리 찾아 볼 수 있을까 싶을 것이다. 양보면을 잇는 신작로에서 좌측 방향에 위치한 명교마을을 바로보면 멀찌기서도 쉽사리 눈에 띄는 것이 마을을 에워싼 대나무 밭과 “명교 숲”이다.특히, 이 명교숲은 명교마을의 소중한 자산이며 대표적 명물이다.명교숲은 비평산 중록(中麓)의 백호동과 똥매산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 숲의 조성연대는 나무의 수형으로 보아 몇백년은 되었다고 한다.제일 오래된 나무는 500여년 정도로 추정하고 있으며, 현재도 정월 대보름이면 마을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이 숲의 상징적인 바위인 두꺼비 바위는 머리가 마을로 향하고 있었는데 조상들이 마을의 안녕과 영화를 위해 머리를 지금과 같이 돌려 놓았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이 숲은 예로부터 마을 사람들의 휴식처이며, 안식처였다고 할 수 있다.한학자인 이우섭 선생은 주위 경관을 보고 풍영대(風詠臺)라는 이름을 지어주기도 하였다.<사진 2 - 명교 숲의 상징적 존재 두꺼비 바위> 첫눈에 들어오는 명교마을의 모습은 그저 맑은 공기, 깨끗한 자연환경, 무엇하나 나무랄데 없이 순박한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시골마을 그대로다.분명 누가 보아도 완벽한 시골의 모습 그대로를 잘 지키고 있다.그러나, 명교마을을 쭉 둘러보고 나면 뭔가 변화를 추구하려는 노력들이 곳곳에 보여지고 있음을 쉽게 느낄 수 있다.이같은 변화는 조금도 시골이라는 이미지를 벗어나려 하지 않았고, 지나친 치장으로 보는 이들에게 거부감이 들지 않토록 하였으며, 오히려 탈바꿈이나 변화라는 표현 보다는 아주 오래전 본래의 것들을 되찾는 듯한 그런 것이다. 이와 관련해, 조순철 이장은 “올해 들어 이제 시작을 하였을 뿐이다” 라며, 자신이 그리고 명교마을이 어떤 목적한 바에 더 큰 기대를 갖게 했다.지금 명교마을 앞 주교천 제방 왕복 800여미터의 구간에는 진짜 양귀비와 가장 흡사하다는 붉은색의 꽃 양귀비가 5~6월 제철을 맞아 제방을 따라 장관을 이루고 있다. <사진 3 - 주교천의 제방을 따라 핀 꽃 양귀비과 명교마을의 전경> 이와함께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마을 진입로 마다 작은 집단으로 조성 된 800여개에 이르는 “솟대” 다. 조순철 이장은 “마을 주변에 대나무가 많아 가치있는 활용 방안을 찾던 중 솟대를 생각하게 되었다”고 밝혔다.덧붙여, 그는 ‘이제 농촌도 다양한 사람들이 더불어 살수 있는 그런 농촌이되어야 하고 앞으로 분명 그렇게 될 것으로 본다’ 고 말했다. <사진 4 - 마을에 흔한 대나무를 이용하여 만들었다는 솟대> 그래서 ‘마을회관’을 주민들이 내집 같이 편하게 사용 할 수 있는 그런 장소로, 그리고 외지에서 마을을 찾는 손님들도 부담없이 수월하게 사용하고 쉴수 있는 그런 공간을 제공키 위해 내부를 일반 가정집과 꼭 같은 구조로 개조를 하였다.또, 여가를 활용한 주민들의 소득 창출을 위해 ‘공동 밤 가공 작업장’을 만들고, 마을 아낙네들의 가장 일반적인 대화의 장 ‘공동 빨래터’에 돌담을 쌓는 등 옛 모습 그대로를 살려서 새로운 공간으로 탈바꿈 시켰다. 따라서, 언제나 명교마을 공동 빨래터에서는 시원하고도 정겨운 이야기들이 숱하게 쏟아져 나오고 그것들이 마을의 안길을 따라 가가호호(家家戶戶) 대문을 두드려 화목한 가정을 이루는 밑거름이 된다.<사진 5 -명교마을의 공동 빨래터> 이밖에도, 명교마을에는 또 하나의 보고, 만지고, 느끼기에 충분한 훌륭한 자랑꺼리가 있다.바로, 『만아도요』와 “홍성선씨 부부”다.홍성선씨는 국내의 명망있는 도예가들이나 다인들 사이에서도 이미 잘 알려져 그 능력을 인정받고 있는 인물이다. 홍성선씨의 만아도요을 찾은 내방객들의 수는 년간 약1000명에 이른다.그저 단순하게만 어떤 계산을 해 보더라도 시골의 면단위 작은 마을에 실로 대단한 가치있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도예가 홍성선씨가 고전면 명교마을에 들어 온 것은 4년전 쯤이라고 한다.경기도 이천이 고향이라는 홍성선씨는 지난 1999년 강원도 평창의 깊은 산골짜기에 고도요를 설립하고 대단한 창작열로 도예인들로부터 주목을 받았으며, 수 많은 다인들의 시선도 한몸에 받았다.그러던 중 2005년 불의의 교통사고를 겪은 후 작업도 중단한채 실의에 빠져있던 그 시기에 하동군 고전면 명교리 명교마을로 들게 되었고, 명교마을 어귀에 지금의 만아도요가 생겨나게 되었다.명교마을 주민이 된 도예가 홍성선씨는 마을의 가치를 찾아가는 조순철 이장의 훌륭한 동반자가 되어주고 있었다.따라서, 조순철 이장과 홍성선씨는 명교마을에서 도자기 체험장의 운영도 추진하고 있다.홍성선씨는 명교마을에 대하여 “예쁜 마을에 예쁜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고 말했다.덧붙여, 그는 ‘이제 시골도 다양한 사람들이 더불어 사는 그런 곳이 되어야 하고 앞으로 분명 그렇게 될 것으로 본다’ 고 했다.한편, 조순철 이장은 “마을의 골목마다 담벼락에 ‘다소 서툴더라도 자연스러우면서도 아기자기한 정감이 가는 그런 벽화 그리기’ 와 ‘객지에 나가 있는 향우들과 고향 마을의 주민들 모두가 하루쯤은 함께하며 우의와 친목을 다질 수 있는 그런 “작은 축제” 를 계획하고 있다’ 고 밝혔다.<사진 6 - 지난 겨울에 명교마을 앞 주교천을 찾아 온 철새떼>/장성춘기자. 블로그 naver.com/ hdnews9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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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 시인 김중열첫눈 시인 김중열 여명이 밝아오기 무섭게 새벽은 보랏빛 그림자뒤로사라졌다첫눈이 살포시 수줍어나뭇가지에 앉아 하얀 구슬을 굴릴때창문을 열고눈 깜박 인사도 채끝나기 전에가로등 불빛속으로 숨어 버렸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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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뒷 이야기> 80비록 시대적으로 동떨어진 캐캐묵은 얘기지만 사람들은 하동이 관향인「하동정씨」를, 여흥 민씨, 광산 김씨, 영일정씨와 함께 조선 4대반성(班姓)으로 쳤는데, 그 중심에는 하동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도학자 정여창(鄭汝昌)이 있다. 대학자로 한글창제 주역이던 영의정 정인지(鄭麟趾)와 정여창은, 찬성사 정지연(鄭芝衍)의 후손인데, 정인지는 정지연의 장자 정익(鄭翊)의 증손이고, 정여창은 정익의 아우 정유(鄭宥)의 6세손이라, 정여창은 그리 멀잖은 정인지의 손자뻘이었다.정여창은 세종32년(1450) 오늘날의 경상도 함양 개평촌에서 태어났다. 스스로 지은 호가 일두(一두), 「한마리의 좀」이란 뜻이었으니 극도의「자기 낮춤」이었다. 어른들이 불러 주는 자는 백욱(伯勖), 「열심히 힘써 이룬 사람」을 뜻했다.「여창」은 아버지 정육을(鄭六乙)이 압록강변 의주부(義州府)에서 통판(通判) 벼슬에 있을때, 명나라 사신 장녕(張寧)이 첫눈에 보고, 특이한 아이라며 「능히 가문을 창성 시킬 인물이 될것이다」라는 해설까지 달아 지어준 이름이었다. 정육을은 요즘의 대대장급 지휘관인 무관직 종3품 함경도병마우후에 올랐다가, 세조 때「이시애(李時愛) 난」을 만나 그만 순직하고 말았다. 정여창 나이 열 일곱 살 때였다. 가례(家禮) 대로 아버지 상을 극진히 치른 정여창은, 홀 어머니 최씨를 지극히 섬기면서도 친구와 어울려 자주 술을 마셨다. 하루는 술에 취해 들에 쓸어져 밤을 새운 일이 있어 어머니가 매몰차게 나무랐다.“아버지 없는 얘가 배우지 않으면 어찌 하느냐? 네가 이러면 나는 누굴 믿고 살겠느냐!”이후 정여창은 김종직(金宗直) 문하에 들어가 공부에 매진하였고, 제향 때 음복(飮福) 말고는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는 어머니를 위하는 마음이 극진하여, 언젠가 어머니가 이질에 걸려 시달리니, 향을 피워 놓고 하늘에 빌기를, 「제몸을 바칠테니 불쌍한 어머니 목숨 만은 살려 달라」며 기둥에 머리를 찧어 흐르는 피가 옷을 적신 일도 있었다.정여창은 벼슬에 나가기 전 3년간 오늘날의 하동 화개 덕은리 악양정자리에 터를 마련, 여유(汝裕)·여관(汝寬) 두 아우와 섬진강 풍치를 즐기며 학문에 몰두, 시·서·역경, 예기·춘추 등 오경(五經), 춘추시대의 노(魯)나라 기록 노론(魯論)에 정통했는가 하면, 그의 특출한 인품이 몸가짐에 그대로 들어 날 만큼 성리학에 통달했다.성종11년 임금이 어명으로 행실이 반듯하고 경학에 밝은 선비를 추천하라 했더니, 유생들이 일제히 정여창을 거명했다. 이리하여 임금 앞에서 강론(講論)을 하라는 천거가 있었으나 그는 완강히 사양했다.성종14년(1483) 정여창은 진사시에 합격하고, 1490년 왕의 특지로 소격서참봉에 기용되었다. 그는 한사코 마다했으나 왕은 허락하질 않았고, 같은 해 별시문과에 합격, 예문관검열을 거쳐 세자시강원설서로 세자 연산군을 가르쳤다. 싹이 노랗던 세자가 성심껏 가르치려 들던 정여창을 달갑게 볼리가 없었으니 결국 악연(惡緣)이 되고 말았다. 성종이 세자를 부탁하는 자리를 마련, 정여창에게 술을 권하자 그는,“신의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술 때문에 실수한 일로 어머니가 나무란 적이 있습니다. 그런 뒤로 술을 마시지 않기로 맹세하였기 감히 어명을 거역하나이다. 용서하십시요!”“참으로 유학자 다운 말이다!” 성종은 이미 고인이 되신 어머니를 생각하는 정여창의 마음에 감격했다.성종25년(1494) 정여창은 지방관 자리를 원해 고향 안음현감이 되었다. 현감은 종6품 직위로 가장 작은 지방행정 단위 수령이었다. 그는 작은 고을 하나를 맡아 뜻을 펴 보려했던 것이다. 정여창은 그야말로 선정을 베풀고 학교를 열어 친히 백성들을 깨우치니 먼 곳에서 사람들이 몰려 들기도했다. 그러나 광풍의 시대 연산군 폭정을 맞아, 그는 「김종직 제자」였다는 죄목으로 곤장을 맞고 먼 북방 종성에 유배 당해 버렸다. 세상과 인연이 끊긴 세월 7년만에 그만 눈을 감으니, 나이 55세, 그가 숨진 그해 9월 다시 갑자사화가 터지니, 사화의 원흉들은 그의 묘를 파헤쳐 해골에 칼질을 했다.음풍농월을 멀리한 정여창은 시를 짓지 않았다. 다만 김일손과 하동에서 어울렸다가 남긴 시가 전하니 그가 남긴 유일한 시작(詩作)이다.風蒲泛泛弄輕柔 갯버들 바람따라 부드럽게 희롱하니四月花開麥己秋 4월 화개땅은 이미 보리가을이네.看盡頭流千萬疊 두류산 천만봉을 모두 구경하고孤舟又河大江流 외로운 배로 큰강 따라 흘러간다.문묘에 배향되고 우의정에 추증된 문헌공 정여창의 묘소는 함양 수동에 있다. 아들 희직(希稷)이 선공직장(繕工直長)을 지냈다. 정연가(한국수필문학가 협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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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을 제대로 알고 지리산을 제대로 노래한 서정시집백사청송 송림공원을 전면에다 내세우고 하동읍을 중심으로 좌측 화심리 만지마을 배밭에서 우측 목도리 소재 포구공원까지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섬진강변 언덕배기에 자리잡은 어느 찻집.눈 앞에 내려다 보이는 지리산 자락 섬진강변의 하동땅은 어느 한 곳 작은 흠집하나 없이 그저 평온하게 억만년의 세월을 고이 지내온 듯 자연이 만들어낸 최고의 걸작품이다.그 찻집에서 만난 송수권 시인(70세)으로부터 최근 화제를 불러 일으키고 있는 그의 시집「달궁 아리랑」을 받았다.송수권 장편 서사시집 "달궁 아리랑"<펴낸 곳 : 종려나무> 시인으로부터 직접 시집을 받자마자 무작위로 넘기다 우연의 일치일까 첫눈에 띈 시의 한 구절이 이렇다."....... '하동송림 모래밭 가에서/ 마지막 지리산을 흔들고 간 이현상의 시신 앞에서/ 엠원 총구에 모자를 씌워놓고/ 동지 잘 가시오! ........."지금까지 하동이 낳은 문학계의 거장 故 이병주의 장편소설 ‘지리산’이나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 등 소설에서는 지리산 빨치산을 다룬 작품들이 더러 있었지만 시로 표현되기는 이번 송수권 시인의 ‘달궁 아리랑’이 처음이라는 것이다.이에, 문학평론가 이형권씨는 장편서사시 달궁 아리랑의 연재를 시작하며 ‘송수권의 “달궁 아리랑”은 빨치산의 역사를 전면적으로 다룬 최초의 장편 서사시이다. 이 작품은 김동환의 “국경의 밤”, 신동엽의 “금강”, 이산하의 “한라산”으로 이어져온 현대 서사시의 계보를 정통으로 잇는다. 모두 27편의 연작으로 발표될 예정인 이 작품은 과거에 묻혀있던 빨치산 문제를 호명하여 현재의 시간 속을 생동하게 끌어낸다. 시상과 서사를 이끌어가는 인물은 역사의식이 투철한 가상의 시인(“나”)이다. “나”는 “달궁 에미”나 “피아골 뱀노인”과 같은 실존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빨치산의 투쟁과 몰락, 그리고 그 이후를 흥미롭게 전한다. 이를테면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에 관한 이야기나 토벌대장 “차일혁”의 이야기, 그리고 토착 주민들의 기구한 일화 등 실제의 서사를 핍진하게 제시해 준다. “나”는 좌도 우도 아닌 인간의 관점, 민족의 관점, 역사의 관점에서 빨치산 이야기를 진지하게 형상화 한다. “달궁 아리랑”은 독자들에게 빨치산의 비극을 활달한 시상과 밀도 높은 서정으로 재발견케 하는 감동의 보고인 것이다.’ 라고 했다.“......... 지금도 6.25 남북전쟁 때 불타버린/ 피아골 연곡사가 있지/ 섬진강 긴 물목을 타고 올라와 제비가/ 집을 짓는다는 연곡사가 있지!/ 이 바탕골 팔십리, 연곡사 넘어서 화개동천/ 화개동천 넘어가서 악양동천/ 악양동천 넘어가서 청학동천/ 하동, 진주, 함양, 산청, 남원을 돌면 12동천/ 노고단 아래 혼자 사는 달궁 에미/ 남부군 씨받이/ 그 노고 할미 있지!/ 지나는 길손들에게 손을 내밀어/ 한 세상/ 잼잼/ 자장자장/ 도리도리/ 짝짜꿍/ 쥐었다 폈다 감았다가 불쑥/ 주먹을 내미는 달궁 에미가 있지!/ 섬마 섬마 달궁/ 시상 시상 달궁. <달궁 아리랑 21 중에서>서사시의 형식을 빌려 지리산 빨치산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화제작, ‘내 시는 눈 내리는 지리산에 바쳐진다/ 그 불타버린 마을들에 바쳐진다/ 네가 버리고 떠난 마을/ 그 산자락 따라 돌며/ 줄초상에 줄제사/ 한날한시에 통곡이 일어났던 밤/ 그 밤 열두시에 바쳐진다<서시에서...>, 서시에서 달궁 아리랑 연작 27편으로 이어지는 700장 분량의 작품집은 빨치산의 투쟁과 몰락, 그리고 민초들의 상처를 노래하고 있다.이에, 덧붙여 송수권 시인은 “내가 보기에 우리 시단은 근현대사 속의 여순반란사건(1948.10.9), 제주 4.3사건, 거창양민학살사건, 하나도 해결 못하는 오갈병에 들었다. 따라서, ‘달궁 아리랑, 2009’을 쓰게 된 동기도 위의 변명으로 설명되리라 믿는다. 단 남북분단 대치상황에서 본다면 우리 삶도 시도 반쪽짜리 삶이라는 엄정한 현실과 미래적 한반도의 역사적 복원은 무엇인가를 물음으로 던지고, 통일한국 100년을 내다보며 중음자 들의 삶으로 남은 그 극복 대안으로서 <빨치산>은 무엇인가를 물음으로 던져보는 시다” 고 밝혔다./장성춘기자. 블로그 naver.com/ hdnews9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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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시인과 함께하는 평사리문학관『달빛 낭송회』열어사진 위 : 5일 최참판댁 사랑채 앞마당에서 시 낭송을 하고있는 정호승 시인사진 아래 : 6일 하동문인협회 회원들과 '토지길 탐방'에 나선 정호승 시인(가운데) 음력 6월 15일 보름날.지리산 자락 구제봉 너머로 솟아오른 둥근달을 악양면 평사리 최참판댁의 사랑채 처마 끝에다 매달아 두고는 사람들은 그렇게 한편의 시(詩)를 읽었다.지난 5일 저녁 8시, 평사리 최참판댁 사랑채 앞 마당에서는 평사리문학관(관장 최영욱) 이 주최ㆍ주관하고 하동군의 후원으로 ?정호승 시인과 함께하는 평사리 문학관 달빛 낭송회?가 개최 되었다.이날 시 낭송회에는 하동문인협회, 진주 화요문학회, 그림내시낭송회, 전북임실문인협회, 전남광양문인협회, 구례문인협회 등 각 문인협회 회원들을 비롯한 전국의 문인들과 지역주민, 관광객 등 200여명이 참석했으며, 초청가수 ‘김산’ㆍ‘철부지들’ 도 함께했다.하동문인협회 사무국장 김남호(시인, 평론가)의 사회로 개최된 ‘정호승 시인과 함께하는 평사리 문학관 달빛 낭송회’는 초청가수 철부지와 여고시절의 ‘이별노래’ㆍ‘허허바다’ 등의 노래로 시작 되었다.자리마다 넘칠만큼 막걸 리가 가득 담겨진 항아리 뚜껑에는 또다른 제 각각의 보름달이 떠 있었고, 그 옆으로 가지런히 잘 차려진 손두부와 묵은 김치 그리고 맛깔스런 족발은 사람들의 입맛은 물론 행사의 분위기와 꼭 맞아 떨어져 나름대로의 제 몫을 감당하기에 충분했다. 먼저, 초청시인으로 낭송 나선 하동문인협회 홍연천 회원은 정호승 시인의 ‘불일폭포’를, 임실문인협회 김영숙 회원은 정호승 시인의 ‘수선화에게’를, 화요문학회 정희정 회원은 정호승 시인의 시로 가수 이동원씨가 노래로 불러서 더 잘 알려진 ‘이별노래’를 직접 불렀으며, 그림내시낭송회 이미화 회원은 정호승 시인의 ‘북극성’을 함께 참석했던 박인재씨의 하모니카 연주에 맞춰 낭송했다.정호승 시인은 인사말에서 “멀리 곳곳에서 많은 분들이 시(詩)를 생각하며 시를 찾아준 것 같다” 말하고, ‘시는 밥을 지을때 물을 붇는것과 같다. 우리가 밥을 지을때 반드시 물을 필요로 하듯 시(詩) 또한 현대의 삶에서는 이렇듯 꼭 필요한 물과 같다’ 고 말했다.이어, 정 호승 시인은 중학교 3학년 교과서에 실려있는 자신의 시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어머니를 위한 자장가’ㆍ‘풍경 달다’ㆍ‘술 한잔’을 직접 낭송했으며, 또한 이 네편의 시 모두를 평소 정호승 시인의 시를 노래로 만들어서 많이 부르고 있는 가수 안치환씨의 목소리로 들었다.이밖에도, 참석한 문인들의 대부분이 저마다 시 낭송에 참여하였으며 행사의 말미에는 30여분동안 모든 참석자들이 초청가수 ‘철부지들’과 함께 신명난 노래들로 어우러졌다.한편, 정호승 시인은 지난 1950년 하동읍 중동마을에서 태어났다.6살 때 당시 상업은행에 근무하던 아버지를 따라 고향 하동을 떠나게 되었으며, 이후 대구에서 초, 중, 고등학교를 졸업했다.경희대학교 국문학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석굴암』이 당선되며 문단에 나서,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詩)「첨성대」당선,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위령제」당선, 1979년 첫 시집『슬픔이 기쁨에게』, 1982년 시집『서울의 예수』, 1987년 시집『새벽 편지』, 1990년 시집『별들은 따뜻하다』, 1991년 시선집『흔들리지 않는 갈대』, 1997년『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및 동화집『바다로 날아간 까치』와 장편소설『서울에는 바다가 없다』ㆍ1996년 장편동화 『에밀레종의 슬픔』, 1998년『연인』, 1999년『항아리』, 2000년『모닥불』, 1996년 수필집『첫눈 오는 날 만나자』등을 내어 놓았으며, 1989년 제3회 소월시 문학상, 1997년 제10회 동서 문학상, 2002년 제12회 정지용 문학상 등을 수상했다.5일 최참판댁에서 달빛 낭송회를 마친 정호승 시인은 다음날인 6일에는 최영욱 회장을 비롯한 하동문인협회 10여명의 회원들과 함께 평사리 일원의 ‘토지길 탐방’에 나섰다./장성춘기자. (블로그 naver.com/hdnews9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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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시인, 하동야생차문화축제 축시 헌정▲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슬픔을 위하여,▲또 기다리는 편지”▲내가 사랑하는 사람 등 주옥같은 수많은 시를 세상에 선물한 정 호승 시인이 오는 5월 1일부터 5일까지 열리는 제14회 하동야생차문화축제에 축시를 헌정한다. 정시인의 축시 낭송은 오는 5월 1일 저녁 7시 30분 “왕의 녹차 천년지애”라는 제목으로 무대를 뜨겁게 달굴 예정이다. 독자로부터 사랑을 한 몸에 받아온 정 시인의 이번 축제 개막식의 시 헌정(낭송)은 자신을 낳아 준 고향 ‘하동'에 대한 보답이라며 겸손하게 말한다.정 시인은 경남 하동에서 출생, 어린시절을 대구에서 성장했지만 어릴적 동심을 키웠던 하동에 대한 추억을 늘 잊지 못하고 하동을 연모해 왔던 탓으로 이번 최우수 하동야생차문화축제 개막식에서 축시를 낭송하게 됐다고 군 관계자는 전했다.정 시인은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동시〈석굴암을 오르는 영희〉,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첨성대〉, 1982년에는 조선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위령제〉에 당선됐다.정 시인의 주요 시집은▲별들은 따뜻하다(1990),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1997)▲외로우니까 사람이다(1998),▲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1999), 시선집▲흔들리지 않는 갈대(2000), ▲내가 사랑하는 사람(2000) 등이 있다.수필집은 ▲첫눈 오는 날 만나자(1996)와 동화집▲에밀레종의 슬픔▲바다로 날아간 까치(1996),▲연인(1998),▲항아리(1999),▲모닥불(2000), 장편소설▲서울에는 바다가 없다(1993) 등이 있다.인생의 맑은 차향기가 되라 정호승(시인)등을 달아라 봄바람이 분다/등불을 밝혀라 봄비가 내린다 /손을 잡아라 섬진강과 함께 춤을 추어라 지리산과 함께/지금은 하동 차나무에 새움이 돋는 거룩한 시간 푸른 빗줄기 사이로 찻잎도 푸르다/지리산은 아들을 키우듯 야생의 차나무를 키우고 섬진강은 딸을 낳듯 하동녹차를 낳는다/바람아 불어라 등불을 밝혀라.지금은 우리 모두 만등헌다의 성스러운 시간/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고 마음의 귀를 열어라/우전이 빙그레 미소 짓는 소리가 들린다/ 일찍 일어나 소나무에 앉은 아침의 어린 새들처럼/노래를 부르는 세작의 노랫소리가 들린다/중작이 어머니처럼 토닥토닥 자장가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대작이 아버지처럼 천천히 논길을 걸어가는 소리가 들린다/차를 끓여라 하동의 왕의 녹차를 끓여라/차를 들어라 녹차의 왕을 들어라/하동녹차 속에는 풍경소리가 들어 있다하동녹차 속에는 지리산을 넘나드는 흰구름이 들어 있다/하동녹차 속에는 지리산을 휘감아 도는 섬진강의 강물소리가 들어 있다/보라 쌍계사 부처님도 하동녹차를 드신다.하동녹차를 드시고 빙긋이 웃으시며 말없이 말씀하신다/차 한잔을 하면 나를 미워하는 마음이 없어지고/차 한잔을 하면 남을 미워하는 마음이 없어지고/차 한잔을 하면 남의 허물이 내 허물로 보이고/차 한잔을 하면 누구나 부처님으로 보인다/지금은 천년 세월이 천년향으로 우러나오는 고요한 시간/여기 차의 고향 하동에서 /천년 고요의 차향기를 맡으라 고단한 인생의 맑은 차향기가 되라. [이 게시물은 (주)하동신문님에 의해 2009-04-27 16:26:11 경제/사회에서 이동 됨]